기타관광지(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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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공산성



공산성(公山城)은 사적 제12호로 공주시 금성동, 산성동, 옥룡동에 걸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성(土成) 400m조선시대 석성 2260m 성곽으로 둘레 2, 660m, 면적 21만㎡이며, 남으로 시가(市街)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금강(錦江)의 연안에 접해있는 해발 110m의 분지형 야산에 위치하며, 동서의 길이가 약 800m. 남북의 길이는 약 400m의 포곡형(包谷形) 형태를 띄고 있다.
원래는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시대 선조(宣祖), 인조(仁祖)때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도성(都城)이기는 하나 백제시대 뿐만아니라 역사의 변천속에서 시대별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였으므로 각 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성(城)의 명칭은 백제시대 축조 당시는 웅진성(熊津城)이라 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공주산성(公州山城)·공산성,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공원제도 창설에 산성공원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성의 구조는 석축이 약 1,925m, 토축이 약 753m, 동문지 밖의 토성 467m까지 포함하여 전체가 2,660m이며 외성(外城)을 제외하면 2,193m가 된다.
현재 성벽은 높이 약 2.5m, 너비 약 3m로 대부분 보수되어 있고, 성벽은 이중으로 쌓여져 있다.성내에는 진남루(鎭南樓)·공북루(拱北樓)·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쌍수산성사적비(雙樹山城史蹟碑)·영은사(靈隱寺)·연지(蓮池)·임류각(臨流閣)·군창지(軍倉址) ·동문(東門)·서문(西門, 錦西樓)등의 유적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의자왕(義慈王. 백제마지막 왕)이 일시 거쳐가기도 하였으며, 또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822년에 김헌창(金憲昌)의 난(亂)이 이곳에서 평정 되었으며, 1623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仁祖)가 피난하였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공북루 (拱北樓) 도지정유형문화재 제37호
공산성의 북문(北門)으로 금강을 바로 통할 수 있는 이 문루는 옛 망북루(望北樓)자리에 선조(宣祖) 36 년(1603)신축한 것으로 처음 시축 후 수차례에 걸쳐 개·보수가 이루어졌으나 본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 문루(門樓)로 꼽고 있다. 고주를 사용한 2층의 다락집 형태인 이 문 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산성 연지(公山城 蓮池) 도지정 기념물 제42호
공산성을 방비(防備)하는 군사적 기능과 경승(景勝)을 관람하는 누각으로써 조선후기 영조(英祖)때 건 립 되였으나 홍수로 붕괴,매몰되었던 것을 1982년 발굴 조사하여, 1984년 에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과 기단석 디딤돌등을 발굴 당시의 원형대로 사용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인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한 것이다. 발굴 당시 이 건물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와 백제시대의 토기, 기와등이 함께 발굴되기도 하였다.
쌍수정(雙樹亭) 문화재자료(유형) 제49호
쌍수정은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으로 일시 파천하여 머물렀던 장소였다. 그 당시 이곳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인조가 이 나무에 기대어 근심에 쌓여 있을 때 난(亂)이 평정(平定)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두 그루의 나무에 정 3품의 통훈대부(通訓大夫)를 하사 하였는데 이후 나무가 죽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영조 10년 관찰사 이 수항이 쌍수정을 건립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후 몇번의 수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건물의 형태가 많이 손상되어 1970년에 전면 해체하고 새로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정왕궁지(推定王宮地) - 미지정
백제의 웅진도읍시기의 왕궁지는 관련 유적이 남아 있지 않고, 기록 또한 왕궁지를 알 수 있게 정리된 것이 부족하여 왕궁의 위치나 실체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1980년 임류각지의 발굴이 이루어져 위치를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임류각에 대한 기록으로‘임류각은 궁의 동쪽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을 할 수 있어 임류각의 서쪽으로 왕궁이 입지 할 수 있는 위치는공산성내에는 이 쌍수정 광장 밖에 없기 때문이다. 표고 85m. 너비 약 6,800㎡의 면적인 비교적 넓은 이 광장 전 지역에 걸쳐 1985년과 1986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건물지를 비롯하여 용수(用水)를 저장할 수 있는 연못과 목곽고 및 저장구덩이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들 유구는 모두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연못(蓮池) - 미지정
추정왕궁지의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우쳐 위치한 이 연못은 위치의 외형상으로 조경을 위한 시설로 보이 기도 하지만, 왕궁에서 쓰는 용수(用水)를 외부에서 길어다 저장하던 시설로 추정되며, 구조는 지면을 깊게 파고 그 안에 자연석의 원형을 쌓아 만든 형태이다. 규모는 상면의 너비가 7.3m, 바닥의 너비는 3m에 이르며, 깊이는 4.18m로 전체적으로 대접형의 정연한 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굴 당시 연못안에는 흙이 완전히 채워져 있었으며, 단판10엽 연화문을 비롯 한 8엽연화문(蓮花紋)등의 기와 종류를 비롯하여 병형토기, 삼족토기, 개물, 등잔, 벼루등 다수의 백제 유물이 출토되였다.
금서루(錦西樓) - 미지정
금서루는 공산성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으나 성안에 도로를 개설하면서 오래 전에 파괴되 어 터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문헌의 기록과 동문의 유구를 조사한 결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철종 10년(1895)에 편찬된 「공산지」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 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건물이었다고 한다.
진남루(鎭南樓) - 문화재자료(유형) 제48호
공산성의 남문(南門)이며, 조선시대에 삼남(三南)의 주문(主門)이기도한 이 문은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석성(石城)으로 개축된 조선 초기에 세워진 문루로 1947년 장마로 유실되었던 것을 1949년 공주고적보존회(公州古蹟保存會)가 재건 하였으며, 지금의 문루는 1971년 전면적으로 해체 보수한 것이다. 문의 형태는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로 대칭시켜 조성한 후 그 위에 장대석을 겹쳐 덮은 다음 문루를 건축한 것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 팔작집이다. 문루의 남쪽 전방이 멀리까지 내려다 보이고, 주변에는 숲이 울창하게 어울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6호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가을 공주에 주둔하면서 공주민을 왜(倭)로 부터 보호 해주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 명(明)나라의 3장수 제독 이공(提督 李公), 위관 임제(委官 林濟), 유격장 남방위(遊擊將 藍芳威)의 업적을 기린 사은 송덕비(謝恩 頌德碑)로서 본래는 공주 금강변 남안에 세워졌던것을 공산성으로 옮겨왔었는데, 일제(日帝)때 일인(日人)들이 공주읍사무소 뒷뜰에 매립하였던 것을 해방 후 다시 이곳으로 이전 한 것이다. 비석은 선조(宣祖) 37년(1955)에 건립된 것이며, 3개의 비석으로 되어 있다. 삼장비의 내용은 "명나라의 3장수는 정유년 이듬해인 선조31년 가을 공주에 이르러 군기를 엄히 다스리는 한편 주민들을 정성껏 보살펴, 공주민은 왜구의 위협하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고 임진년에 비로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광복루(光復樓) 문화재자료(유형) 제50호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광복루는 원래 해상루라 하여 성내의 중군영(中軍營)의 문루였던 것을 중군영이 폐쇄되면서 일제초기에 이곳으로 옮겨 웅심각이라 불렀다. 이후 퇴락된채로 남아 있다가 1945년 공주 주민이 합심하여 보수하였으며, 이듬해 4월 김구(金九), 이시영(李時榮) 선생이 이곳에 이르러 국권회복(國權回復)의 뜻을 기념하는 의미로 광복이라 하여 광복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8각의 고준한 화강암 주초위에 고주를 올린 이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류각(臨流閣) - 미지정
임류각은 백제가 공주로 왕도를 천도한 후, 약 25년이 지난 24대 동성왕(東城王) 22년에(501)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고층건물로서,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으나 훼손되어 없어졌던 것을 1980년 발굴 조사하여 1993년 본래의 위치에서 윗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이 복원된 건축물이다. 복원된 임류각은 한쪽 변이 10.4m의 정방형의 건물로 면적은 109㎡에 이르며, 초석의 배열은 남쪽열에 6매, 동쪽 열에 7매를 배치해 총 42매의 초석을 사용한 2층 형태로 조사된 임류각지의 규모에 맞게 조성된 대형 누각이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에 "春期臨流閣於宮東高五仗,五月王興左右宴臨流閣終夜極歡( 춘기임루 각어궁동고오장, 오월왕흥좌우연임루각종야극환) 【봄 궁성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5장이었다. 또 못을 파고 진기한 짐승들을 길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은사 대웅전(靈隱寺 大雄殿) 문화재자료(유형) 제51호
영은사는 조선 세조대왕의 사액(賜額)으로 국가에서 창건하였고 광해조 7년 승장(僧將)을 두고 전도사찰(全道寺刹)을 통관(統管)하였다고 공산지에 기록되어 있다.
동문루(東門樓) - 미지정
이 문은 훼손되어 유지만 남아있던 것을 1980년 발굴조사하여 건물 밑부분의 구조를 확인하였다. 성문의 너비는 2.5m였으며 문지옆 양쪽에는 원래의 문루를 지탱하였던 문지석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철종 10년(1859)에 편찬된‘공산지(公山誌)’에 2층 3칸 이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1933년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 형식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