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국립공원
계룡산국립공원 | 전설,설화 | 찾아가는길 | 등산코스
계룡산국립공원
계룡산국립공원 계룡산은 1968년 국내에서 두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으로 해발 845.1m의 독립된 명산으로 산세가 수려하며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 하여 계룡산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공주시에 주로 위치하면서 일부가 대전광역시와 논산시에 걸쳐있다.
계룡산은 나라에서도 주목한 명산으로서 나라에서 큰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백제때 이미 계룡 또는 계림산등의이름으로 바다건너 당나라까지 알려 졌던계룡산은,차령과 노령 두 산맥사이에 이룩된 잔구성 산지로서 석영반암이 융기한 군봉이 장관이다.
주봉인 상봉(천황봉 845.1m)을 비롯하여 연천봉(738.7m), 삼불봉(775.1m), 문필봉(796m) 그리고 관음봉·황적봉·도덕봉·신선봉 등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이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봉우리 사이에는 7개의 계곡과 3개의 폭포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며, 골짜기에는 동학사· 갑사·신원사 같은 유서깊은 사찰들이 위치한다. 역사적으로도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큰 절이 창건되었는가 하면, 신라 5악의 하나인 서악이었으며, 조선시대초에는 주요한 왕도 후보지로서 건설되다가 중단 되었고, 「정감록」에는 도읍지뿐 아니라 피난지로도 적혀 있어 도참설의 주요 근거지로 여겨졌다.
근대 이후에도 신도안을 중심으로 이른바 「신흥종교」들의 본산이 되었다. 계룡산이 이처럼 민간신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계룡산 자락이 신기가 넘칠 만큼 깊고도 품이 넓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도 또한 맑다. 또 반드시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터가 되어야 큰힘이 있다."하고는 나라안에 이런 곳이 네 군데 있으니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문화의 구월산과 함께 계룡산을 꼽고 있다. 그는 계룡산의 웅장함에는 오관산만 못하고 수려함에는 삼각산보다 못하나, 그 맥이 멀고 깊어 정기를 함축하였다고 했다. 계룡산의 아름다움, 그리고 거기에 담겨있는 신령스런 분위기를 묘사한 글들이 많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빼어난 것으로 위에서 명기한 조선왕조 성종때 문장가인 서거정의 한시「공주십경시」중 「계룡산의 한가로운 구름」을 들지 않을수 없다.
계룡산을 읊은 시로 이만하면 가히 절묘의 극치를 다한 시라고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계룡산과 맥을 같이하는 공주시의 주변 산들도 수려하기가 이를데 없다. 공주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월성산(313m)을 최고봉으로 하여 대체로 200m미만의 작은 산들인 공산성·주미산·봉황산·연미산·취리산 등이 있다. 금강은 이들 산지를 뚫고 공주시가지 북쪽에서 마치 띠를 두른 듯 동쪽에서 서남을 관류하고 있는데, 금강에 아지랑이가 덮이고 동녘 산이 밝아오는 즈음에 봉황산에라도 올라보면 공주의 산수 풍경은 조물주가 아니면 가히 만들수 없는 한폭의 산수화가 바로 그것이다.

계룡산국립공원 계룡산은 1968년 국내에서 두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으로 해발 845.1m의 독립된 명산으로 산세가 수려하며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 하여 계룡산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공주시에 주로 위치하면서 일부가 대전광역시와 논산시에 걸쳐있다.
계룡산은 나라에서도 주목한 명산으로서 나라에서 큰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백제때 이미 계룡 또는 계림산등의이름으로 바다건너 당나라까지 알려 졌던계룡산은,차령과 노령 두 산맥사이에 이룩된 잔구성 산지로서 석영반암이 융기한 군봉이 장관이다.
주봉인 상봉(천황봉 845.1m)을 비롯하여 연천봉(738.7m), 삼불봉(775.1m), 문필봉(796m) 그리고 관음봉·황적봉·도덕봉·신선봉 등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이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봉우리 사이에는 7개의 계곡과 3개의 폭포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며, 골짜기에는 동학사· 갑사·신원사 같은 유서깊은 사찰들이 위치한다. 역사적으로도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큰 절이 창건되었는가 하면, 신라 5악의 하나인 서악이었으며, 조선시대초에는 주요한 왕도 후보지로서 건설되다가 중단 되었고, 「정감록」에는 도읍지뿐 아니라 피난지로도 적혀 있어 도참설의 주요 근거지로 여겨졌다.
근대 이후에도 신도안을 중심으로 이른바 「신흥종교」들의 본산이 되었다. 계룡산이 이처럼 민간신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계룡산 자락이 신기가 넘칠 만큼 깊고도 품이 넓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